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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나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는 일찍이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을 통해 여성이 제대로 문학을 할 수 없는 것은 여성은 돈이 없고 자기만의 방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나는 방의 소유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게는 밤이면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3년 전, 코로나 펜데믹으로 자택 대피령이 내려 사무실 출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몇 주 또는 몇 달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는데 장기화하며 결국 재택근무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 후 지금까지 집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 집에 있는 3개의 방에는 모두 주인이 있다. 작은 방 두 개는 우리와 사는 조카 둘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고, 큰 방은 아내와 내가 쓴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하니 각자 자기 방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고 나는 거실의 식탁에서 일을 했다. IKEA에서 산 직사각형의 식탁은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테이블이다. 여기에 노트북과 메모장 필기도구를 놓고 일을 했다. 식사 때가 되면 내 살림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밥을 먹고, 식사가 끝나면 다시 펴서 일을 했다.     아이들은 학교로 돌아갔지만, 재택근무로 전환한 나는 계속 식탁을 차지하고 일을 한다. 얼마 전 주말,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조카 녀석을 불러 가구를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가끔 하는 일이라, 아 또 분위기를 바꾸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무엇이 바뀌었나 하고 나가보니 식탁으로 쓰던 테이블을 페티오가 내다보이는 창문 앞으로 옮기고, 식탁이 있던 자리에는 차고에 두었던 전에 쓰던 둥근 식탁이 놓여 있다.     아내가 마련해 준 내 방, 아니, 나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이제 아침이면 나는 이 테이블로 출근한다. 밥을 먹기 위해 하던 일을 서둘러 치울 필요도 없고, 아내도 내 눈치를 보며 상 차리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다. 조금씩 살림이 늘어 테이블에는 시계와 램프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도 있다.     생각해 보니 내게는 늘 나만의 공간은 있었지만 나의 방은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책상 아래쪽의 서랍을 내 몫으로, 위쪽은 동생의 몫으로 정해 주곤 했었다. 가장 먼 기억의 방은 할아버지와 같이 썼고, 외가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썼으며, 커서는 동생과 같은 방을 썼고, 결혼해서는 배우자와 같은 방을 썼다. 아내와 함께 쓰는 방은 밤에 잠을 자는 공간일 뿐, 결코 나의 방은 아니다.     아내가 정해준 공간 밖은 내게는 미지의 세계다. 벽장과 서랍장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집은 아내의 공간이며 나는 손님에 불과하다. 결국 객은 주인의 눈치를 보며 살 수밖에.     내가 제대로 된 문학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게는 돈도 없고, 나만의 방도 없기 때문이다. 고동운 / 공무원이 아침에 할머니 할아버지 벽장과 서랍장 사무실 출근

2023-03-06

[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어머니 날(Mother’s Day)

5월 8일은 어머니 날이다. 대부분의 국가는 어머니 날이 있으며, 미국은 5월 둘째 일요일로 정하였다. 그 유래를 찾아보니 1908년 필라델피아에 사는 어느 효녀가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는 마음으로 감리교회에서 흰 카네이션을 돌리면서 시작 되었는데, 국경일로 정해진 후 너무 상업적으로 번지자 오히려 이 효녀는 어머니 날을 취소하라고 소송을 걸기도 했다. 원래 그녀는 어머니 날을 어머니와 가족 간의 개인적인 축하의 날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꽃집, 카드 가게 등이 이를 가만히 놔둘 리 없고 본질을 흐리게 하자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여간 그것은 백여 년 전 이야기이고 요즘 어머니 날에 아들 딸들이 꽃이나 선물을 안 하였다가는 그 해는 안면후치로 거시기 해질 것이다. 어머니의 은공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가 무식한 후레자식으로 어머니의 힘과 존재는 현대 사회에서 막강하다. 심지어 아버지도 그날은 같이 가세하여 꽃이라도 바쳐야지 구경만 하고 있다가는 무사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날은 어머니가 신이다.     그러나 요즘 이상하게 그 문전 성시였던 카드 가게는 줄줄이 문을 닫고 꽃 가게도 그리 신통치가 않다. 효심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성인데, 인터넷 시대로 선물은 아마존 택배로, 카드는 이메일로 뒤바뀌어 그전에 우편으로라도 손에 카드를 쥐어본 어머니로서는 뭔가 서운하고, 선물은 택배 차가 문 앞에 던지듯 놓고 가 만족도가 많이 떨어졌다. 그리고 멀리서 자식들이 화상 통화랍시고 전화를 걸어오니 점점 뭔가 우주에서 유영을 하는 기분이다.   어머니는 남성 사회에서 그리 오래 대접을 못 받아 왔는데 여성이라기보다 생명을 직접 창조하고 남성으로부터 구박을 받아 가면서도 자식을 어렵게 키워오신 분으로 어머니라는 존재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담겨 있다. 아기들이 태어나서  “엄마” “맘마”로 부르는 이 단어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어머니라는 단어다. 어머니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아기가 자기 스스로 만든 첫 언어다.     이 달에 어머니의 생일까지 겹친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주 바쁜 달이다. 게다가 6월 셋째 주 아버지의 날이 또 있어 봄맞이 할 정신은 그리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다. 아버지 날이라고 어머니 날과 똑같이 안 하면 그건 인종 차별을 넘어선 성적 부모 차별이다. 손자가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있는 딸년 집은 친정, 시댁까지 합쳐 그날은 아수라장이다.     그런데 그날 사회에서 부모를 위해 소비된 비용을 보니 어머니 날은 240억 달러, 아버지 날은 170억 달러로 편차가 심하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좀 더 분발하여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금년은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많이 올랐으나 상관없는 일이다. 나도 이날은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 시를 하나 지어 봤다.     高松里 :     먼 산 하나 / 산 상투리 잡고 / 좌우로 늘어진 능선 마루 / 비단 물결이 아래로 내려 쏟는 / 그 소나무 떼 흐드러진 끝자락 / 하나의 종소리 있어라 / 할아버지 예배당 세우고 / 아버지 매단 종 / 덩그렁 소리 있어라 / 쭉 뻗은 뙤약볕이 / 고요한 벼 벌판을 흔들고 / 사잇길 아래 / 아해들 맑음 소리가 / 논두렁이 흐흐 / 냇버들 하하하 끝이 끝이 없어라 / 아버지 냇물 바위 딛고 / 학교 가고 오고 / 할아버지 그 바위 너설 추스르며 / 아해들 그냥 하하 웃어라 / 아해들 망태 그물 그득그득 하여라 / 할아버지 아버지 허허 탈탈 / 이제는 큰 소나무 속 누워 사시고 / 아랫고술 뾰족 지붕 / 아직도 세월에 / 아직도 햇살에 / 그냥 반짝이기만 하여라 / 그냥 허허 / 눈허리가 저 밀기가 하여라 (hanhongki45@gmail.com)     한홍기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어머니 mother 요즘 어머니 할아버지 예배당 할머니 할아버지

2022-05-05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 아이를 바르게 성장하도록 이끄는 힘은 바로 부모의 말과 행동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괴  행동을  그대로 배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다.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은 그 제목만으로도 마음에 따뜻함을 느껴 선택했던 책이다. 원제목(The Education of Little Tree)이 말해주듯 주이 책은 주인공 작은나무가 세상을 배워가는 성장소설이다.  자연이 들려주는 영혼의 지혜가 담겨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대사가 모두 가르침이 된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대공황 무렵. 인디언 소년 작은나무는 다섯 살 때 부모를 잃고 체로키족 혈통을 이어받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산속에서 살게 된다. 작은나무는 사냥과 농사일, 위스키 제조 등 할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생활에 꼭 필요한 것만을 자연에서 얻는 인디언식 생활방식을 터득해 나간다.. 그들은 가장 작고 약한 동물만을 죽인다. 그래야 크고 강한 동물들이 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꿀벌들은 자기들이 쓸 것보다 더 많은 꿀을 저장하기 때문에 곰한테 너구리한테 체로키한테 뺏기는 거라며, 사람들도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죽어가는 것이라고 일러준다. 그래서 체로키들은 영혼이 빠져나간 통나무만을 땔감으로 쓰고, 절대 취미 삼아 낚시를 하거나 짐승을 사냥하지 않는다.     작은나무는 할머니한테서 읽기와 쓰기, 산수 등을 배우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셰익스피어나 워싱턴 전기 등의 책을 할머니가 낭독해 주는 것을 들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운다.. 할머니는 영혼에 관해 들려준다. 사람은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는데 하나의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 다른 하나는 영혼의 마음이다. 만약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남을 해칠 일만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을 이용해 이익 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영혼의 마음을 크고 튼튼하게 가꾸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는 것뿐이다. 이해는 사랑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사랑하는 체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할머니, 할아버지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심오한 삶의 철학이다. 현대인들이 인디언의 생활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다.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체로키족의 모습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체로키족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비해 놓고 조용히 맞이한다. 할아버지의 친구 윌로 존은 살았을 적 소나무가 많은 씨앗을 퍼뜨려 따뜻하게 해주고 감싸주었으니 이젠 소나무 옆에 묻혀 소나무의 거름이 되겠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날마다 산을 오를 때마다 생전 처음으로 그 모습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산이 깨어나고 있어!”라고 말하던 그곳, 자신만의 비밀장소에 묻힌다.   작은나무가 겪은 일 중에 가장 슬픈 일은 억지로 고아원에 보내진 것이다. 작은나무의 조부모가 교육받지 못했고 인디언인데다 외할아버지가 밀주 제조 혐의로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는 전과자여서 아이를 기를 자격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고아원은 작은나무에게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작은 나무’는 고아원을 운영하는 목사한테서 사생아라 불리며 멸시받고 가혹하게 매를 맞는다. 다행히 할아버지 친구인 윌로 존의 도움으로 작은 나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평온한 시간도 잠시 윌로 존의 죽음에 이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작은나무는 홀로 세상에 남겨진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다운 삶의 지속은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나온다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꾸어야 하며, 그 비결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물질주의의 거대한 급류에 휘말려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설교'는 한 가닥 지푸라기만도 못한 주제일 수 있다. 하찮은 들꽃 하나, 작은 나무 한 그루에 스며들어 있는 '영혼'을 그들은 믿지 않으려고 하니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멸망사를 다룬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 주오〉를 오래 전에 읽은 이라면, 그 후 20세기 초 인디언들이 미국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문명의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이 새와 나무와 풀들과 나누었던 영혼의 대화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현대문명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을 때 또 다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출구가 될 터이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문명은 거의 스러졌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지혜는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남아 빛난다. 그들의 삶의 태도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들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인간이 알아야 할 세상의 근본과 삶의 교훈을 일깨워준다.“당신이 태어났을 때 그대는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그대가 죽을 때는 세상은 울고 그대는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라.” 체로키족의 잠언이다.     손녀에게도 이 책을 읽히고 싶어졌다.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책을 추천하고 사서 읽혀보라고 일러주었다. 얼마 후  아들 집에 들렀을 때 손녀의 서가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발견했다. 물론 영어로 된 원서였다. 10년 전 우리 부부가 중국애서 돌아왔을 때 그 애는 네 살의 꼬마였다. 엄마 아빠가 모두 일하기 때문에  그 애와 함께 지내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몫이었다. 우리 부부는 손녀와 함께 놀아주면서 할아버지는 한글을 가르치고  할머니는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그 애는 성경의 에스더 이야기를  특히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애는 책읽기를 좋아했다.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 손녀가 판타지 소설을  출간했다. 14살 짜리 중학생이 쓴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400쪽이 넘는 꽤 두께가 있는 공상소설이다. 전화를 걸어  격려해주고 언제 이걸 썼느냐고 물었더니 코로나 팬데믹으로 집에 갇혀 지내는 동안 틈틈이 썼다고 한다. 아이들은 쓰면서 자란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글로 쓰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거듭하고 더 나은 무언가를 궁리하면서 자란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글을 써본 사람은 안다. 문장 하나 쓰는 게  얼마나 고독한 작업인가를. 글이 잘 써지지 않거나 미래가 불안할 때마다 헤밍웨이는 옥탑방 창가에 서서 파리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자신에게 말하곤 했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한 문장을 써 봐.." 바로 내가 손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김지민 기자영혼 할아버지 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인디언식 생활방식

2022-04-20

[독자 마당] 파피꽃은 다시 피고

 아름다운 계절 4월이 다시 찾아왔다. 5년 전 4월 파피꽃 단지가 장관을 이뤘다는 신문기사에 마침 방학으로 쉬고 있던 3명의 손주를 데리고 구경에 나섰다.     집에 있는 것보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게 하고 싶었고, 어디론가 차를 타고 떠나는 기분도 너무 좋을 것 같았다. 아침 일찍부터 며느리는 김밥을 싸고 과일과 음료수를 준비해 시끌벅적하게 떠났다. 그날 파피꽃 동산을 뛰어다니는 손주들을 보며 우리의 마음도 덩달아 뛰어다니며 즐거웠다.     그 이듬해에는 노인 친구들 몇이서 떠났다. 멋 부리며 쓰고 간 안경과 모자에 한껏 자세를 취해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마스크 쓰지 않은 옛날 모습이 신기해 보이기도 한다.     그 이후 코로나가 우리의 발목을 잡아 놓아 노인들은 마치 금족령이 내려진 것처럼 꼼짝 못하고 있다.     그때 뛰놀던  손주들은 이제 13살, 16살, 18살이 되었고 큰 손녀는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자고 해도 따라가기 않을 나이가 된 것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뛰어 놀던 꼬마들이 이젠 키도 우리를 훌쩍 넘어버린 청소년이 되었다.     씽씽 운전하고 다녀왔던 76세 할아버지가 81세가 됐고 집에 먼지 쓰며 세워뒀던 차는 언제 운전할 지 모른다는 아들 며느리의 말에 두말 없이 처분했다. 필요할 땐 며느리 차를 빌려 병원에 다녀오지만 이젠 장거리 운전은 자녀들이 못하게 막는다.     세월만 흘러간 것이 아니라 정상적이던 모든 생활도 많이 변해 갔다. 그래도 올 봄 다시 아름다운 4월의 경치가 신문에 실리고 TV뉴스에 화려하게 나오면 마스크라도 쓰고 바람이라도 쐬러 가고 싶다. 파피꽃은 올봄에도 활짝 피어 우리를 부르겠지만 5년 전과 같은 기분이 나려나 모르겠다. 예쁜 색 새 모자나 준비해 두어야겠다.  정현숙 / LA독자 마당 할머니 할아버지 아들 며느리 장거리 운전

2022-04-18

[독자 마당] 할머니의 손주 사랑

 할머니의 손주 사랑이 뇌 촬영을 통해 의학적으로 증명됐다고 한다. 때로는 직접 낳은 자식을 향한 사랑보다 클 수 있다는 연구 결과다.     연구 과정은 잘 모른다. 다만 젊은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 돌보기가 24시간 일이고 여기에 경제적인 문제까지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할머니에 비해 온전하고 순수한 사랑을 주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종종 손주 돌보기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젊어서 아이 키울 때와 손주를 돌보는 것은 다르다. 전적인 양육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편한 시간에 손주를 예뻐하면 된다. 그러다가 힘을 들면 딸이나 며느리에게 돌려 보내면 된다.     그렇다고 할머니들이 자신들이 편한 시간에 아이를 예뻐하고 귀찮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밥도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준다. 문제는 그런 일들의 책임 주체가 예전 자식들을 기를 때와는 달리, 할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맞벌이 하는 자식들을 위해 아이들을 가끔씩 봐준다.     그런데 한 가지 모든 젊은 부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아이를 맡길 때 노인들의 신체적 조건을 고려해 달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인들이 3~4살짜리 아이를 돌볼 때는 안전사고가 날 수 있다. 특히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거동이 불편할 경우에는 더욱 문제가 된다.     이 나이의 아이들은 집안 이곳저곳으로 뛰어 다닌다.  그러다 보면 넘어질 수도 있고 물건에 부딪혀 다칠 수도 있다. 하지만 할머니의 ‘기동력’으로는 이들을 따라 잡을 수 없다. 그렇다고 방치해 둘 수도 없다.     할머니의 손주 사랑은 끝이 없다. 돌보기에 힘은 들어도 손주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그 이상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어제 다녀간 손주가 다시 보고 싶다.  정민숙 / LA독자 마당 할머니 손주 손주 사랑 할머니 할아버지 손주 돌보기

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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